Grow Resilient/Stream of Consciousness

나?

402번째 거북이 2024. 9. 1. 12:52

사하라에서 탈출하지 못한 바르크처럼 살다가 가지 않겠다고 매년 다짐해오고 있긴 하다.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삶이 무엇이고 내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자주 잊곤 한다.

"난 수많은 징조들로 나의 최후를 예견했어. 이런 것이 그 중 하나야. 나는 신발을 조금 더 찢고, 부풀어 오르는 내 발을 눈으로 비비거나 또는 그저 심장이 좀 더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거의 두 시간마다 멈춰 서야만 했어. 하지만 나중에는 기억을 잃곤 했어. 다시 출발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 그제야 정신이 들곤 했지. 그럴 때면 매번 뭔가를 잃어버린 후였어. 처음에는 그게 장갑 한 짝이었는데, 그 추위에 그건 심각한 일이었지! 내 앞에다 벗어놓았는데, 그걸 다시 챙기지 않고 그냥 출발했던 거야. 그 다음에는 시계였고, 그 다음은 칼. 다음에는 나침반. 매번 멈춰 설 때마다. 난 가난해졌지...
다행인 것은 그래도 한 걸음을 내딛는다는 것이지. 한 걸음 더. 항상 똑같은 걸음을 다시 시작하는 거야..."

꼭 생과 사의 기로에 놓였을 때만 이런 것은 아니겠지. 나아가기 위해서 찢거나 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 모두 챙겨가면서 걸음을 다시 시작할 수 없을 때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걸 책임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이상했다. 왜 버리는 것이 책임인가... 삶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 아닌가? 책임은 신발이나 시계나 나침반 따위를 잃어버린 것에 있지 않다. 책임은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최후에 (인간으로서의) 삶을 저버렸을 때 나를 기다릴 누군가. 항공로에서 완성이란 덧붙일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빼내야 할 것이 없을 때라고 했다. 기요메가 살아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책임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며, 모든 것을 다 버렸지만 책임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바르크가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잊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 맺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들판 여기저기서 타오르는 저 등불 중 몇몇과 소통하기 위해 애써야만 한다."
"왜 우리는 타인을 미워하는가? 우리는 서로 굳게 결속되어있다. 같은 별에 사는 이웃이고 한 배를 탄 선원이다."

그래서 이걸 책임이라고 이야기했었나보다.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내기를 걸었고, 졌다. 내 직업에서는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난 바닷바람을 호흡했다.
한 번이라도 바닷바람을 맛본 사람들은 그 자양분을 잊지 못한다. 동료들이여, 그렇지 않은가? 위험하게 산다는 것이 아니다. 위험하게 산다는 그 말은 잘난 체 하는 것이다. 나는 투우사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위험이 아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삶이다."

 

완성은 삶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것이며, 우리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내 스스로에 대한 책임,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에 대한 책임, 내 이전에 이걸 겪었던 이들에 대한 책임,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 대한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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