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ow Resilient/Stream of Consciousness

열등감에 대해

402번째 거북이 2024. 5. 25. 17:43

 내 결핍과 불안감이 어디에서 오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빌려오자면... 지위로 인한 불안에 대처하는 가장 유익한 방법은 이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세나 근대 이전에 살던 사람에게 사회가 부자/빈자로, 농민/귀족으로 나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매우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이 나누어놓은 것이니까.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계급에 따라서 생활양식이 결정되었지만, 당연하게도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었다(그 계급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선한 사람들은 가난한 농민을 존경하여야 했고, 그것이 죽은 후 내세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었다(수도원장 앨프릭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구성원이 단연 농부이며 귀족이나 성직자 없이는 살아갈 수 있지만 농부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마음을 달래주는 신약의 이야기로부터 죄가 많고 부패한 부자는 결국 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본인들이 천국의 문을 가장 먼저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위안을 얻는다.

 과거와 비교해보았을 때 우리는 어느때보다 물질적으로 진보한 사회에서 살고있으며(옛날에는 귀족이나 왕실 사람들만 누릴 수 있었던 물건들이 이제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영역에 들어가는 경우가 다분하다) '노력만 한다면 원하는 꿈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귀족사회에서 하인들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했지만 지금 사회의 행정과 미디어는 나의 현재 상황을 극복하고 사회의 정상에 올라갈 수 있다고 부추긴다. 슬프게도 이 경제적 능력주의의 등장은 실패란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그래 마땅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나 성공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은 그럴만한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반면에 실패한 사람 역시 그럴만하기 때문이라는 관념이 만연해졌다. 현재의 수준을 남들만큼 끌어올리지 못하는 이유가, 과거에는 내 기회가 박탈당해서였지만 지금은 내가 '실제로 열등하기 때문'이 되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있으면서도 신분사회보다 더한 결핍을 느끼면서 산다.

 작가가 과거의 계급사회로 회귀하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가 지위를 분배하는 원칙에 옳고 그름이 있는 것도, 그것이 불변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고 느꼈다. 어떤 사회에서는 군인이 찬사를 받고 다른 사회에서는 토지를 소유한 자가 찬사를 받는다. 안전이 문제가 될 때는 용기있는 투사가 존경받으며 동물의 고기에서 영양분을 섭취해야 하는 공동체에게는 짐승을 죽이는 사람들이 선망의 대상이 된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 가면 자기계발 파티션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들이 아주 옛날에는 아프니까 청춘이었고 내가 학생때는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아 였다.. 요즘은 ~에 미쳐라! 인 것 같다. 재밌는 것은 도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나를 계발하는 방법'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을 만큼 논리적이고 맞는 것인지, 아니면 그 유행이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찬양하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책에서 주장하는 '관념'이, 삶에 대한 어떤 태도가 바람직한가에 대한 기준이 계속해서 바뀐다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도서관에 발을 들이려 했을 때 동료와 동행하거나 소개장을 가져오지 않으면 여자는 도서관에 들어올 수 없다고 제지당했다. 그를 제지한 이에게 '나쁜' 의도가 있었다거나 그에게 도덕적인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여자가 남자와 똑같은 교육의 권리를 누린 적이 없는 시대였고 당시 가장 저명한 의사들과 정치가들 역시 여자의 정신이 생물학적으로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믿었었기 때문이다. 내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던 것은 울프가 그 상황에서 "도서관에 입장이 허용되지 않다니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가 아니라 "나를 들여보내지 않다니 이 제도가 틀리거나 부당하거나 비논리적인것은 아닌가"를 스스로 물었던 것이었다.
그의 이 질문은 제도, 관념, 법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라 때로는 어리석고 편파적이라는 인식에 기반한 것일거다. 대부분의 사람이 합리적이라고 느끼는 능력주의는 사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현대 사회가 '성공'이라고 일컫는 많은 요소들이 운에 달려있는 경우가 많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였지만 그를 패륜아라고 희롱하거나 그를 탓하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는 그가 겪은 재앙이 그의 자질과 관계없이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극 작품을 읽으며 누구나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내 윤리적인 수준이나 능력과 관계없이 어떤 상황에서는 그들과 같은 재앙에 휩쓸릴 수 있음을 인식한다. 우리가 아는 비극 작품들의 대부분은 파멸을 맞이한 사람들의 책임을 면제해주지는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어떤 수준의 공감을 보여준다. 이를 '비극'이라고 일컫는 것도 우리가 이러한 줄거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훌륭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에 슬픔이라는 공감을 느끼고 실패한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내 현재 지위에 불안을 느끼는 것은 실제로 열등해서가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지금 이 사회의 구조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도록 구성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조가 만들어낸 그 관념은 절대적인것도, 불변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알랭 드 보통이 하고싶은 말인 것 같다. 나의 능력과 노력이 나의 현재 위치를 완전히 결정하는 것이 아니며 관념에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만으로도 많은 위안이 된다. 불안은 이 사회가 정의하는 '성공적인 삶'과 '성공적이지 못한 삶' 사이의 차이를,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집단의 판단 방식을 내가 이해하고 존중하며 인정하기 때문에 생긴다.


실패하는 것에 대한 걱정은 나를 달리게 하고 타인을 존중하며 꿈을 꾸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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